실업수당을 신청하러 청주고용센터에 갔다. 나만 몰랐던 걸까? 여기에 펼쳐진 이 세상을. 대기인원 60여명. 오늘 수당신청 교육을 한 번에 끝내고 가려던 내 조그만 바람이 어려워보였다. 다른 창구는 아주 한산한데 신규자를 면접하는 창구만 북새통이다. 항의를 안 할 내가 아니다.
“아니, 이거 오늘 안에 일 보겠어요? 상담직원을 늘리던지 해야지. 뭐 실직자는 다 한가한 줄 아시나보네욧!!!”
“저희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생님…….”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생각지 않은 긴 시간의 낯선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생기 없는 눈빛이 되어가는 것. 그렇게들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순간 화가 났다. (이걸 잘 다스려야 실직생활이 순탄할 테지만…….)
‘당신도 이 대열에 끼어 비슷한 모양을 지어보시오.’라는 무언의 장치가 여기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이 일그러진 하루를 어떻게 추스를까? 이 어벙한 시간을 채워 줄 책이 눈앞에 보인다. 얼마 안가서 졸음이 확 밀려왔다. 번호표와 책을 쥔 채로 소파에 기대 잠이 들었다. 수면제를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꽤 깊숙한 낮잠을 자는데 번호가 ‘띵똥띵똥’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빠르게 내 귀에 달려들었지만 이제 그냥 쭉 자고 싶다.
창구에서 ‘항의하던 고객님 잘도 주무시네ㅋㅋㅋ’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무 많이 벌어진 입을 닫으려 살~짝 잠을 깼을 때 전광판을 보니 내 순서가 이미 지나갔다. 점심 먹고 왔는데 거의 4시다.
벌떡 일어나 창구에 갔는데 직원이 손바닥 만한 종이 한 장을 주며 거기 적힌 대로 집에 가서 인터넷 교육을 마치고 오라 한다. 이미 전화로 상세하게 문의하고 워크넷 회원가입이며 해야 할 절차를 마치고 왔건만. 이걸 받으려고(전화로도 가능한 일을) 시간 반을 기다렸나 너무 어의가 없어서 궁금했던 것도 못 물어보고 집에 왔다.
나와 일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열심히 일해왔다. 나에게 그야말로 쉴 수 있는 시간이 왔는데도 지난 몇 주간은 전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하루 계획한 일을 꼭 마치려고 전보다 더 바쁘게 지냈다. 사방 아늑한 내 집에 머물면서도 무슨 외나무다리에 올라가 있는 사람처럼 불편했다.
영어전문강사들이 지난 4년간 교육부를 상대로 고용안정을 위해 힘겹게 싸워왔지만 6천여 명 전원이 해고 되었다. 남의 목이라고 참 쉽게도 자른다.
나는 덕분(?)에 휴가(?)를 가는 쪽을 택했다. 나에겐 다가오는 한해를 버틸 자신감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재 응시를 통해 선발된다 해도 나는 하나도 기쁠 것 같지 않았다.
일자리에 대한 불안함이 나를 힘들게 했던 순간들이 많다.
어느 날은 수업을 하다 ‘이 아이들이랑 헤어질 수 있나?’라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름 잘 정리했다고 생각하는 감정들도 시험에 통과하긴 쉽지 않다. 환송회에서 나는 장난스런 말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데 앞자리에서 앉은 동료의 충혈된 빨간 눈을 보는 순간 나는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나와 한 교실에서 일해 온 원어민 샤이나. 한국말을 모르는 그 친구는 자기 맘대로 내 말을 이해하고 울었다. 그동안 말이 안 통해 고생했는데 마지막까지 고생이 계속이다. 한국말도 영어도 왜 이렇게 어려운가!
아이들과 활동할 아이디어가 생각 날 때마다 메모를 했는데 나는 항상 If(만약에)라는 단어로 시작했다. 결국 그 ‘만약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게도 잡고 싶던 일이 내 곁을 떠났지만 나에겐 내일이 기다려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늘 당장 빈둥거리며 놀아도 된다. 아침마다 삼단 같은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며 “시끄러, 빨리, 빨리!!”라고 안해도 되고 매일 생겨나는 내 시간을 도매로 넘기지 않고 내 맘대로 쓸 수도 있고 고향의 아버지께 전화할 시간도 있고 걸어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계곡물처럼 흐르는 내 안의 말(言)을 수첩에 적을 시간이 생겼고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인 큰 아이에게 피곤에 지친 엄마가 아닌 따듯한 밥을 차려주며 용기를 주는 엄마가 되는 마지막 기회다. 대학생이 되면 더 이상 엄마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내가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아이들에게 나는 베이스캠프가 될거다.

하늘의 가장 빛나는 별을 바라볼 시간도 있고 미뤄뒀던 영화대본을 하루 종일 읽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페이스북에 아무 말이나 올려도 된다.
소통이 부족한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킬 단 한마디를 하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최고로 선량한 사람은 모든 확신을 잃어버렸고, 최고로 악한 자들은 어두운 열정에 몰두하나니”
오늘은 예이츠의 말에 밑줄 쫙~! 대책은 천천히 세워봐야겠다.

 

글쓴이: 김기선 회원 (영어전문강사입니다. 현재 계약만료로 실직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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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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