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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센터는/센터가 만난 사람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 오범진

 

 

  김민기가 작사하고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가사 일부인데 이 노래를 듣다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범진이다. 1980년대 중반 공장 문을 두드릴 때부터 초심을 잃지 않고,

현재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이, 그가 오범진이다.

 

 

# 어떤 어린시절을 보냈는지?

 

청주 가덕면 행정리에서 태어나 행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덕중학교에 입학한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아버지가 쓰러진 것이다. 평소 입에 술을 달고 다니던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져, 청주 석내과에 1년 동안 입원한 후 중학교 2학년 때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1년 사이에 논과 밭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되었고, 기댈 곳 없는 청주 석교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런 후에 진학한 곳이 조국근대화의 기수청주기계공고이다. 당시 정밀기계, 전기, 금속등으로 과가 나뉘웠는데, 정밀기계를 선택했다. 3때인 19857월말 경기도 반월공단 내 동양노즐로 취업을 나가, 이듬해 봄까지 첫 공장생활을 하다가 청주로 돌아왔다.

 

# 노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쇠를 깎던 청소년 오범진이 철의노동자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빛고을교회 때문이었다. 친구 김용규가 같이 가자고 해 따라간 곳은 빛고을교회였고, 교회 목사는 한신대를 나와 사회민주화운동에 전력하고 있던 김용규 형 김창규였다. 빛고을교회에서는 청년부 내에 노동자학습팀을 꾸렸고, 이 팀에 그는 김용규, 이경식, 김은미, 김재옥 등 10명과 멤버를 이루었다. 변증법, 노동의 역사, 철학에세이, 노동조합, 어떻게 만드는가등의 책을 갖고, 이른바 의식화교육을 받았다. 강사는 현재 충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지성씨였고, 이후에는 충북전자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고, 청주시의원을 한 이용상씨가 바톤을 이어 받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싹수가 빨갛던(?) 것이다. 이때 함께 공부한 멤버들은 1990년대 초 청주지역 노동운동의 주요 투쟁사업장이 된 한국야금, 충북전자, 뉴맥스의 핵심 간부들이 되었다.

 

# 본격적으로 노동자의 길을 가시면서 경험한 이야기는 무엇이 있는지?

 

본격적으료 기지개를 켠 곳이 한국야금이다. 1966년에 설립된 한국야금에 청년노동자 오범진이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983일이다. 공장문을 처음 두드린 날로부터 16개월 후 노동조합의 깃발을 꽂았다.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은 조규동을 비롯한 7명과 함께 각자의 집을 다니며 6개월을 준비했다. 199124일에 있은 노조 결성대회에는 오범진이 진행을 맡았고, 후일 청주경실련 사무처장을 맡게 되는 이두영씨가 교선부장으로 참여했다. 시내 모식당에서 결성대회를 마친 노동조합 집행부는 공장으로 들어와 노조 결성 보고대회를 가졌다. 경과보고 역시 그의 몫이 되었다. 키가 작아, 나무의자에 올라선 그는 여러분의 단결된 힘으로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듭시다라고, 감명적인 연설을 해, 순식간에 50명으로부터 노조가입서를 받았다.

 

이때부터 오범진은 물 만난 고기였다. 노조 설립 후 3개월 동안 회사 정문에서 출·퇴근 투쟁과 공장주변 청소 등 준법투쟁을 해, 사무실과 상근자 2명을 확보했다. 위원장과 함께 상근을 하게 된 그는 노조살림을 도맡아했고, 91~92년 임단협투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1년도에는 상여금 140% 인상(420%560%)과 기본급 20% 인상(12만원)을 따냈다. 조합원의 단결된 투쟁 속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는 더욱 똘똘 뭉쳤고, 청주지역 민주노조운동의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청주지역 노조대표자모임을 주도했으며, 지역노동조합협의회 건설 논의의 물꼬를 텄다. 또한 연합풍물패인 해방굿패에 적극 참여했다.

1992년 충북지역 첫 파업사업장으로 이름을 남긴 한국야금은 13일 파업을 기록했다. 요즘은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 몇 백일이라는 말도 무덤덤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청주에서는 13일 파업이 남다른 느낌이었다. 회사에서는 물과 전기를 끊었고, 노조는 가족의 손을 잡았다. 지역노동자들과 충북대학교 학생들이 힘을 보탰고,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 그 이후의 삶은 어떤지?

 

한국야금에 민주노조 깃발을 꽂고, 91~92 ·단협 투쟁을 승리로 이끈 한국야금노조의 주역 오범진에게 암흑의 날이 다가왔다. 199210월 말 결혼을 앞둔 그는 교통사고가 나, 아내 될 사람을 잃었고, 본인은 1년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 재활치료를 받고, 회사와의 실갱이 속에 943월 회사로 복직했을 때 노동조합 사무실에는 노사 신뢰성 회복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소위 어용노조가 들어선 것이다. 그에겐 참으로 어루운 시련기가 닥쳐왔고, 20102월 해고되었다. 20126월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하면서 투쟁을 접고,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청주 수곡동에서 3년여 동안 솔밭생고기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청주 주변의 자그마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길을 가겠다는 오범진은 이제 중년노동자가 되었다. “과거 노동운동했던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삶의 지렛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표했다. 그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상록수같은 노동자로 우리의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존재로 거듭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