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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센터는/일하는사람들의글쓰기모임

나는 지금 동창회 중

 "선배님, 얼른 들어와 봐요. 엄청 시원해요”
월악산으로 여름 MT 갔던 대학교 2학년 때던가. 칠흑 같은 밤이었다. 무리와 떨어져 계곡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후배 S가 옷을 전부 벗더니 물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우주와 알몸으로 교감하던 S가 가끔 떠오른다.


동창회, 그놈의 동창회가 문제라더니 나도 예외 없이 스마트폰 밴드에 초대 받았다. 대부분 자랑질 한마당이다. 파일럿인 후배는 오늘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 다음날은 뉴욕의 센트럴파크 사진을 올렸다. 자녀를 시카고 명문대학 졸업시키고 나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소연하는 선배도 있다. 보스톤에 가면 씨푸드를 먹어야한다며 입 쩍 벌린 사진 올릴 땐 언제고. 하지만 나는 모든 글에 늘 ‘좋아요’를 누르고 될 수 있으면 성심껏 축하해준다. 그걸 하느라 얼마나 애썼을까 헤아려보면 자랑스러운 일을 같이 나누는 게 고맙다.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S가 드디어 밴드에 등장했다. S는 곧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랜만 이예요. 선배. 여전히 섹시하세요?”
“구럼, 구럼, 섹시는 기본이지. 근데 너네동네가면 너한테 밀리겠는걸.ㅎㅎㅎ 가끔 보고 싶더라 S야. 부모님은 안녕하시니? 네가 대학교 1학년 때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고향 엄마 말이야”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대화는 아주 천천히 남겨지고 읽혀지고 이어졌다. 너무 오랜만의 대화이니 급히 하다 체할까봐.
“지난 4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치매 때문에 기억이 자꾸……. 아버지 생각하면 그냥 가엾기만 해요”
이 말을 들었을 땐 미국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노모의 상을 치렀던 어떤 이가 생각나서 한국에 왔었냐고 묻지 않았다.


“라서방은 잘 있지?”
하루가 지나서야 S 남편 안부를 물었다.
“그 사람이랑은 아이가 5살 때 헤어졌어요. 제가 엄격한 시아파회교도 아내로 사는 게 엄청 힘들었던 듯해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걸 넘겨보려고 농담을 건넸다.
“내가 요새 약간 맹랑한 생각을 해. 오래 살면 분명히 좋은 기회가 또 한 번 올거야. 난 아주 오래오래 살아야지.ㅎㅎㅎ”
나는 청주의 보수적인 시집을 배겨내기도 힘겨웠는데, 그 동안 S가 겪었을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겁다. 아이 셋의 이혼녀. 아랍의 한국여자. 히잡.


S는 20년 전 시애틀의 한 대학에서 MBA를 공부하던 대학원생이었다. 스스로 학비를 벌기에도 바빴던 S는 한국유학생 모임과도 거리를 두고 지냈고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였다.
S는 거기서 아랍인유학생 L과 사귀게 되었다. 같은 대학교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던 나도 그 커플과 가끔 저녁을 먹었는데 ‘나라면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곤 했다. S의 문화적 수용력이 놀라웠지만 나는 선배랍시고 S의 그런 선택이 결혼식장에서 까지 불안했었다. 그런데 결국 이혼이라니.


저녁밥을 지어놓고는 두바이에 전화했다.
“라서방 이 나쁜 놈!”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이를 얼마나 끔찍이 여긴 다구요. 짧은 소매입고 화장 좀 진하게 하고 출근하는 저를 조신한 여자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남편이 부담이 되었나봐요. 저도 양보하지 않았어요. 저도 배울 만큼 배웠는데 제가 왜요”
결국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남편에 대한 원망은커녕 라서방보다 더 좋은 남편을 만나 시험관아기로 쌍둥이를 낳았는데 지금 4살이라고 한다. 
‘이거 내가 하는 맹랑한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네.ㅎㅎㅎ’


두바이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과 진행하던 S의 비즈니스 이야기며 아부다비에서 생활 이야기에 이혼얘기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적지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고 생각하던 나의 삶도 잠시 단조로운 느낌이 들었다.
S가 지난 봄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나의 기우였다. S는 매년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몇 년 전 전화가 오긴 했었다. 그때 내가 너무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말한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S가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거라 추측을 했던 것 같다. 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나 보다.


S는 내가 대학시절 남을 위로해주는 일을 잘했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내가 정말 그랬나. S와 통화로 오래전 여러 모습의 나를 잠시나마 만나게 되었다. 아주 잊을 뻔 했던 나를.
전화하다가 창문 너머 베란다에 큰 트렁크가 보인다. 작년에 집나갈 때 쌌던 가방이다.
“S야, 사실은 나도 작년에 이혼했었어.”
“에이, 다시 잘 살고 있잖아요.”
“아니야, 방까지 얻었었다니까.”
S에 대한 걱정이 풀린 나는 아주 맘 놓고 수다를 이어갔다.


다음날 중간고사를 보러 학교 가는 딸아이에게 시험 잘 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네가 뭘 원하는지 항상 살펴봐야 해. 그리고 매 순간 용기를 잊지 마. 파이팅! 글로리아!”
다른 친구들의 성공담보다 용감하게 선택하고 책임졌고 도망치지 않았던 S의 용기가 나를 움직이는 아침이다. 남 걱정 그만하고 이제 나도 잘 살아봐야겠다. 하하하.  <끝>

 

글쓴이 : 김기선 (영어전문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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