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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센터는/센터가 만난 사람

은빛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환경미화원 - 박광현

 

 

은빛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아저씨. 취미로 드럼을 치는 환경미화원 박광현 회원.

 얼핏 보면 도인 같기도 한 그와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 야유회 때였다. 이후 파업을 겪으면서

         천막, 곱창집, 생맥주집에서 가끔씩 정담을 이어오던 그를 인터뷰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와 대화를 주고받다보면 특유의 솔직함과 겸손한 태도에 내 마음을 다잡게 된다.

 

 

 

 

#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2년 전에 귀촌했구요. 오기 전에 버스기사로 일했고, 집사람과 고양시에서 부동산 일을 좀 했었구요. 무작정 좋아서 귀촌을 했어요. (하필 왜 음성에 오셨죠?) 처갓집이 음성이라서요. (농사를 지으시진 않으시나요?) 조금씩 텃밭 수준이죠. 농사가 재밌어서 하고 있어요.

 

 

# 환경미화를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원래 고양시에서 부동산을 하고 있는데, 아시는 분이 여기 사장으로 계셨어요. 느닷없이 그 분이 저한테 자리가 하나 있는데, 시골인데 내려올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바로 오케이하고 그 다음 날 내려왔어요. 저희 집사람이 많이 도와줬죠. 아무 말 없이, 원하는 대로 하고 살라고. 3, 4개월은 모텔방에서 살았어요. 나중에 무작정 졸라서 사정리에 땅을 조그맣게 사서 집을 지었어요.

 

 

#작은책, 노민추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작은책에서 글쓰기를 해  97년도인가 96년도에 제가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을 했어요. 노동조합이 너무 어용이어서 만들었죠. 현재 안건모 작은책 대표와 활동을 많이 같이 했었죠. 2000년 초반에 한참 운동을 할 때, 제가 좀 몸이 아파서, 수술을 한 세 번하고 8년 집에서 쉬었어요. KD그룹 대원고속에 어떻게 취직이 돼서 3년간 또 많이 싸웠고, 우리 집사람이 몸도 안 좋으니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제발 쉬어라 해서 좀 쉬다가 부동산 하다가 여기로 내려오게 됐어요.  95년도에 민주노총이 창립되었는데, 노민추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어요우리 선배들이 만들었죠. 정말로 어렵게. 지하에서,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고 중간에 몇 명씩 만나서 얘기하다가. 소식지 발간을 많이 했어요. 글을 한 두 번씩 쓰다가 작은책과 인연이 되어 연재도 좀 많이 했고요.

 

지난번에 전태일문학상 제10회 문학상 받았었죠. (작품 제목이 뭐였죠?) <내가 노동자가 되기까지>에요. 전혀 그런 걸 몰랐다가 같이 활동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도 알게 되고.

 

 

#환경미화원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세요.

 

저는 환경미화원이구요. 거기서 운전직을 하고 있고. 새벽 6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3시에 끝나죠. (그럼 출근이 언제시죠?) 저희는 출근이 550. 10분정도 있다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일 시작해서. 많이 좋아졌죠? 처음에 할 때는 540분에 일하러 나갔어요. 그러니까 출근이 520, 30분 이었는데, 싸워가지고 6시에 시작해서 3시에 끝나는 걸로. 그것도 하나의 큰 성과죠. 주로 저희는 금왕 시내 다 돌아요. 지금 재활용 치우는데 재활용은 시내 외곽까지 다 돌아요. 처음에 왔을 때는 가연성이라 해서 마른 쓰레기 치우다가 7개월 만에 음식물 1년 하고 지금은 재활용이죠. 201642일에 입사했어요. 곧 있으면 2년이 되네요.

 

 

#노동조합은 어떻게 결성하시게 됬나요?

 

나는 또 내려올 때 그냥 조용히 살고 농사나 짓고. 술도 잘 안먹으니까. 회사 내에서 재미는 없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회사가 너무 힘들게 하니까. 아침에 출근하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오만 잔소리. 뭐 하지 마라. 오죽하면 24시간 중에 8시간 만 빼고 나머진 다 내 시간이다, 생각하고 출근을 맨날 했으니까. 그러고 나서 작년 6월에 사장이 바뀌면서 많이 변했죠. 이사라는 사람이 힘들게 하니까. 군청에서 직접노무비로 100만원이 나왔는데 50만원 빼먹고. 그 일을 계기로 처음에 10명 정도가 뭉치게 됐죠. 처음에 그 사람들 싸인 다 받아서 노동조합 만들자 했던거고, 김규원 지부장과 함께 만들게 된 거죠.  그전에는 김규원 지부장이 혼자서 활동했던거죠. 즉 노동조합의 시작은 

직접노무비 횡령 사건을 계기로 노동조합 활동이 시작된 거죠. 그거하고, 우리 사람답게 살자고. 그지 같은 놈들. 알량한. 정말 그 속에서 울화통이 터져서그래서 조합원을 모집해서 같이 시작하게 된 거죠.

 

 

# 센터와의 인연은 맺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노동인권센터가 있는지 몰랐어요. 사정리 들어가서 농사지으면서 거의 일 년 동안은 회사 퇴근하면 여기(금왕)에 안 내려왔으니까.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술도 잘 안 먹으니까. 그러다가 지부장을 만나서 얘길 듣고, 한 번 오라고 그래서 (야유회에 갔지). 제가 시민단체 서너 군데 후원을 하고 있어서, 어디 한 군데 더 후원하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그때 인권센터는 몰랐고, 참여연대가 있길래 참여연대를 소개시켜달라고 했죠. 그래서 지부장이 소개시켜준다고 부른 데가 인권센터 야유회 자리였어요. 그때 처음 인권센터를 알았죠, 그 자리에 있던 참여연대 분들이랑 인사도 하고. 그 뒤로 인권센터에 한 두 번 오게 되고 후원의 밤 할 때 회원 가입을 하게 된 거죠.

 

일반 시민단체 보다 열악한 게 노동단체거든 사실은. 정말 어두운 곳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살펴 줄 수 있는게 바로 이곳이 아닌가. 가끔 와서 보면 그래도 실장님이 사람들과 많이 소통하려고 그러고. 보통 웬만한 노무사든, 법무사든 일단 상대방이 얘길 많이 하면 짜증내고 말을 끊거든. 실장님 전혀 그런 게 없고 들어준다는 것. 어떤 곳이던 간에 내가 힘들어서 내 얘기를 들어주라고 가는 거지,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어서 가는 사람은 없거든요. 내가 어려운 얘기를 했을 때 상대방이 들어준 건만으로 내 응어리가 풀어져요. 그런데 인권이나 노동문제로 갈 데가 없어요. 이런 노동인권센터가 생긴 게 그렇게라도 내 응어리 진 마음을 풀고라도 갈 수 있는 곳. 해결이 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래서 이런 곳이라면 내가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선뜻 후원하겠다고 생각했죠.

 

 

# 센터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요?

 

노동인권센터는 노동자들을 이끌어 가는 게 아니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생각을 같이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내가 여기 왔을 때 내가 무슨 얘길 해도 들어주고. 여긴 정말 편안한 곳이다. 어떤 법적인 걸 떠나서 인간적인 정이 있어서 뭉쳐지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법률적인 것은 우리보다 더 나은 변호사들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곳이 아닌 내가 얘길 했을 때 들어주고 정말 편한 곳. 생각과 뜻이 같은 사람들이끼리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막걸리도 한 잔 먹고 형 아우도 되고. 이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법적인 게 먼저 들어서면 딱딱하게 되고 인연이 금방 꺼꾸러질 수도 있어요. ‘이렇게, 이렇게 하세요하고 조언으로 끝나면 그 뒤가 없어요. 인간적인 공간. 여기 가면 어떤 얘기든지 들어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같이 가보자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