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 전반의 제도 문제를 개선하려는 민중운동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크게는 민란과 변란으로 구별된다. 소위 민란이라면 탐관오리들에 대한 하층민들의 폭력적인 투쟁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봉건체제에서 비롯된 농민항쟁이었다. 가장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호소와 등소인데 등소는 지금의 서명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이름을 잇대어 써서는 관아에 고하는 것이었다. 산에 올라가 수령의 비리를 크게 고하는 방법은 지금의 선전물을 나누어 주고 시위를 하면서 큰소리로 비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일부 농민들이 관아에 몰려가 호소를 하고 심지어 관청의 문을 부수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농민항쟁 즉 민란의 진짜배기는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봉기’라 할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륭전자노조, 하이닉스비정규직노조, 현대차비정규직노조들의 투쟁 등 모두가 조선시대의 민란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조선시대 민란의 주된 세력은 지금의 노동자집단과 같은 농민들이었다. 지금의 투쟁이 노동자와 기업주와의 갈등을 기본 동력으로 하듯이 조선시대에는 지주와 전호(소작농)의 갈등이 기본 동력이었다. 여기에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가혹해지만 농민들의 저항은 거세게 일어나게 된다.
지금의 노동자투쟁은 조선시대 농민들의 투쟁 방식과 모두가 흡사하다. 지금 활동가들이 계획하는 투쟁전술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 농민들이 사용했던 것 그대로라는 점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지주와의 갈등에다 탐관오리의 가혹한 수탈에 직면한 농민들의 선택은 굶어 죽느냐 싸우다 죽느냐 둘 중에 하나였다.
이들은 집회 장소와 날짜를 정한 다음 농민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집회를 개최한 후 대표단을 뽑아 관아에 자신들의 뜻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없다. 농민들의 다음 단계는 농기구나 몽둥이로 무장하고 관아로 쳐들어간다. 지금의 노동자들이 관공서를 점거농성 하려 할 때나 회사의 대표자 면담을 위해 전경들과 싸우는 것과 유사하다. 불참자에게는 벌금을 부과한다. 일종의 투쟁분담금을 징수하거나 징계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관아를 점령하지만 수령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고 심한 말로 모욕을 주거나 특별한 경우 가마에 태워 고을 밖에 버린다. 일이 잘 풀릴 경우 관아와 협정 문서를 맺고 발표한다. 지금의 단체협약이나 노동부 조정합의문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 민란은 기본적으로 경제투쟁이다. 참여층도 다양했는데 ‘부농’ ‘자작농’ ‘소작농’ ‘나무꾼’등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인해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은 농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했다. 이는 지금의 민주노총의 다양한 참여층과 유사하다. 아마도 조선시대 소작농은 지금의 비정규직일 게고 나무꾼은 영세업체에서 정리해고 되어 투쟁중인 노동자 쯤 될 것이다.
농민들에게 사또 원님은 행정 사법 군사권 조세권까지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따라서 농민들은 원님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고 투쟁의 범위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1회성으로 그쳤으며 전국적인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고 철저히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의 기업별노조의 경제투쟁이 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민란의 시기인 ‘춘투’가 다가왔다. 더욱이 정권과 기업주들은 부려먹기 좋게 노동시장 구조를 개악하려고 한다. 해고를 일상화 하고 경쟁방식의 임금체계로 충성을 강요하고자 한다. 연장근로 확대는 물론 비정규직과 파견근로의 문을 활짝 열겠다고 한다. 여기에다 노동자들의 후불적 임금인 연금마저 빼앗겠다며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빼앗고 내치려는 자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이제 ‘4.24총파업봉기’로 내닫고 있다. 이 투쟁은 경제투쟁을 기본 동력으로 하고는 있지만 전국적 연대라는 점 특히 악법철폐 등 정치투쟁의 성격까지 포함되어 있다. 특히나 ‘선제적총파업’이란 무시무시한 용어까지 동원된 만큼 되레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우리 민중들의 삶은 세월을 가리지 않고 고달프기만 하다. <끝>
글쓴이 : 오현식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