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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슈/기사&칼럼

세상에 대한 직시

어제 ‘지역작가와의 만남’ 모임에 다녀왔다. 이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우리지역 작가의 책을 골라 읽고 그 작가를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필자는 1년 전 쯤 ‘검사 그만 뒀습니다’의 저자로서 이 모임에 나갔고, 그 후 가끔씩 나가다가 최근에는 출석률이 좋아지고 있다.


이번 모임은 스물네 번째다. 읽은 책은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이다. 지은이는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다. 책 제목은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제목만으로라면, 미학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기도 쉽지 않고 읽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나도 모르게 책에 빠져들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공재 윤두서(1668∼1715)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윤두서는 현종에서 숙종 때의 사람으로, 증조부가 고산 윤선도(1587~ 1671)다. 윤두서는 남인 계열 사람인데, 당쟁의 심화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형과 친한 친구이던 이잠(이익의 형제)이 역적으로 몰려 죽고, 아내마저 일찍 세상을 떠, 개인사적으로는 참아내기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세상에 대해 원망이 아니라 직시(直視)를 한다. 그가 바로 바라보는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그런 직시를 통해 어려움을 견디어내고 새로운 나로 변해간다. 그는 이것을 ‘염정자수(恬靜自守)’라고 표현하였다. ‘평온하고 고요한 가운데 자신을 지킨다’. 이것은 다름 아닌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길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대한 직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우린 다른 차원의 수준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그런 만큼 다른 것들에 대한 배려도 생겨난다. 나의 개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문광훈 교수는 이 ‘염정자수’에 대해 굉장한 애착을 갖고, 평소에도 이를 읊조린다.


윤두서의 ‘세상에 대한 직시’가 잘 드러나는 것이 그가 그린 자화상이다.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래서 더욱더 기개가 느껴지는 눈, 양쪽 귀에서 턱 아래까지 그리고 코 아래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수염. 문광훈 교수는 이 그림에 반해 윤두서의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이 그림은 국보 240호다.


문교수는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관념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혈연, 학연, 지연 등의 집단관념에 개인의 가치가 매몰되다 보니, 참다운 생명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없다. 기본적으로 사회의 변화도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어느 정도 쌍방적이기는 하겠지만), 집단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사회나 개인이 진정으로 변화할 여지는 희박하다.


몰상식한 집단관념의 예를 하나 들자면, 천안함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부 조사결과 북한의 소행이라고 결론이 났으니, 국민들 모두가 이를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그 결론에 대해 의심을 하면 종북이라고 몰아세우는 이 나라가, 정녕 민주주의 사회인가. 이는 개인의 사고나 판단능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성완종 사건이 터지자, 참여정부 때 사면을 걸고 물타기 하는 새누리당 정권의 후안무치함을 보노라면, 역겨움에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 그들은 우리 국민들 수준을 그렇게밖에 보지 않는다. 그동안 그들은 터무니없는 집단관념으로 국민들을 세뇌시켜 온 것이다.


그들의 역겨운 행태에 분노가 치밀지만, 그 분노를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우리는 세상을 직시해야 한다. 눈을 똑바로 뜨고. 그렇게 나 자신까지도 직시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삶이고 예술이다.


문교수는 ‘심미주의 선언’에 엄청난 공을 기울였다. 자신의 삶을 다 녹여놓았다. 자신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책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정말로 삶이 예술이고, 개인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것이 사회 전체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끝>

 

글쓴이 : 오원근 (청주노동인권센터 운영위원이고, 변호사로 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