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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슈/기사&칼럼

한상균 그리스도

혹시 비위에 거슬리는 제목이었다면 사과드린다. 그런데 예수가 어떻게 살다간 인물이었는지 알고 나면 되레 그가 화를 낼 게 틀림없다. 그리스도 예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1급 지명 수배자였으니 말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지금은 이렇게 흥얼거리기라도 하지만 그가 태어나던 날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들판에서 노숙하던 목동들과 먼 나라에서 찾아온 여행자 몇몇이 달려가 반겨주었을 뿐 세상은 드러내놓고 박대했다.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바람에 그의 어미는 마구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다. 그가 태어난다는 소리에 수도 서울은 온통 술렁였고, 그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통치자는 군대를 움직였다. 아기를 없애는 데 실패하자 근방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리는 포괄적 거점타격을 감행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한상균이 이 정도는 아니잖은가.

 

예수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떠돌며 천대를 받았다. 위정자들은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렸다. 그에게 몰려들던 가난한 사람들이 방패가 돼주기도 했지만 막판에는 제자들마저 떠나고 혼자 남는다. 


체포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자가 있었다. 장차 임금이 될 아기라며 사냥개들을 풀었던 폭군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아비가 노리던 사냥감을 손에 넣게 된 자식은 헤벌쭉거렸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전리품을 챙긴 쪽은 따로 있었다. 제국 로마는 자신이 고안해낸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숨통을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큰 바위로 무덤을 찍어 눌렀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무장군인들을 시켜 죽은 자를 감시하게 하였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한상균은 아직 이런 소요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수상하잖은가. 화염병은커녕 술잔 하나 깨뜨린 적 없는 순한 사람을 날 때부터 지독하게 미워하다 사형장의 이슬로 끝장내버린 심사도 그렇지만 그토록 모질게 대해놓고 다시 오라고 하는 건 또 무엇인가? 워낙 놀라고 진절머리가 나서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짐작한다만 정말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쩔 셈인가? 다시 오시라는 그 말이 진심이라 믿고 묻는다. 그러면 그가 흉악범처럼 압송되던 날 카메라를 들이대고 바짝 쫓으며 “남 걱정 말고 네 목숨이나 건져보아라!” 악악거리고 조롱하던 중계차량들을 앞으로는 어쩔 텐가. 다시는 이따위 소란이 생기지 않도록 “당장 십자가에 못 박으라!” 엄숙하게 휘갈기던 문장들과 따따부따 짖고 까불던 목소리들은 또 어떻게 처분하려는가. 그날의 조롱과 모독을 뉘우치지 않았다면 부디 돌아오시라는 빈말은 그만두어야 한다. 사람의 얼굴이 아무리 두껍더라도 이런 식의 안면몰수는 무섭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이 땅의 맑은 풀잎”이었던 예수가 졸지에 “허리에 도끼날이 박힌 상처받은 소나무”가 되고 마침내 “별자리에서 쫓겨난 착한 별”(도종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하늘에 있어야 할 하늘나라를 땅에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세속의 법도가 엄연한데 하늘의 뜻을 펼치자고 떠들어댔으니 잘난 놈들이 보기에는 가소로웠을 것이다. 생전의 예수에게 쏟아졌던 숱한 비난 가운데 가장 점잖았으면서 정곡을 찔렀던 발언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어째서 우리를 간섭하려 드십니까?”였다. 악령의 입에서 나온 대사였다. 하늘이 보낸 아기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는 일찌감치 그 어머니가 예고했던 바다. 


“주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며 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신다.” 대대로 특권을 누리는 복된 자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소리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이루자면 억강부약(抑强扶弱)이 우선이고 필수인데 노동자들이 더 죽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믿는 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다. 


외람되게도 한평생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톨릭교회의 수도자와 사제들은 매일 황혼 무렵이면 어김없이 마리아의 이 노래를 부르며 한없는 기쁨에 젖어든다.

 

그리스도교가 하필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 가운데 태어난 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로 높이 받드는 이유는 아무리 볼품없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성탄의 아기가 묻는다.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너희는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뜨겁게 서로 지져대느냐? 농민 백남기는 때려눕히고, 노동자 한상균은 꽁꽁 묶어서 가둬놓고는 그래도 변함없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니 우리는 지금 단단히 미쳤다.




※ 청주노동인권네트워크 대표 김인국 신부가 2015. 12. 18.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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